자신의 얼굴처럼 ‘대담하고 정열적이며 야성적인 체취를 발산하는 여배우’로 뚜렷한 자기 개성을 자신이 출연한 모든 영화에서 그대로 보여준 최지희가 81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영화배우 최지희는 전후 세상이 격동하는 시절에 반항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대적 아이콘으로 떠올랐었던 배우 최지희의 생애를 만나보겠습니다.
최지희의 어린시절
배우 최지희는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한국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946년 경남 하동으로 이주한 최지희는 4형제(언니 둘, 남동생 한 명) 속에서 자라 어린 시절의 삶은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최지희는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합니다.
최지희는 15세가 되던 해 집을 떠나서 친구와 함께 부산 범일동에 있는 삼일극장 연구생으로 입단했습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쇼 공연의 백댄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최지희의 머리속을 가득 메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극단이 재정난으로 해체되고 난 뒤 대구여관에서 볼모로 잡힌 최지희는 귀인을 만나게 됩니다. 최지희는 때마침 <산적의 딸>(1957)을 촬영하러 대구에 온 윤예담 감독을 보게 된 것입니다.
최지희는 그 감독의 여동생을 따라다니다가 서울까지 함께 오게 되고 명동에서 <인걸 홍길동>(1958)을 제작 중인 최남용씨를 만나 수양딸이 되면서 현재의 이름인 ‘최지희’로 개명하게 됩니다. 최지희의 본명은 김경자입니다.
최지희는 그해 <인걸 홍길동>과 <아름다운 악녀>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스타가 된 최지희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을 불러들이면서 본격적인 ‘소녀가장’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열심히 촬영하며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최지희는 만리동에 집을 사게 됩니다.
그러곤 바로 집 한 채를 더 살 만한 돈이 모이면 또 집을 사는 식으로 돈을 불려갔다고 합니다. 당시 집값은 300만원 정도 선이었는데요, 10대 소녀의 벌이로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당시 최지희의 출연료는 10만원 선이었다고 합니다.
최지희는 부르는 곳은 다 뛰어다니면서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해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부동산 투자를 이때 이미 시작한 셈입니다.
최지희의 첫사랑과 미국유학
최지희의 다음 작품은 <오부자>(1958)와 <애모>(1959)였는데, 최지희는 이 작품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배우학원에 등록해 연기를 배우면서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밀려드는 스케줄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최지희의 첫사랑인 박동선 씨를 만나게 됩니다. 최지희는 김지미 씨의 결혼식장에 다녀오는 길에 들른 다방에서 조지타운대 학생회장으로 잠시 귀국해 있던 그와 우연히 만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박동선씨는 최지희에게 공부를 더 하라고 권유하면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칠 가정교사까지 보내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이런 그의 정성에 감복해 최지희는 어렵게 미국유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최지희가 1961년 미국유학길에 오르기 전 5월 15일 출국기념 파티를 했습니다. 소공동 국제호텔 정글바에서 국내 영화인 전체와 미 대사관의 공보관들까지 초대한 큰 파티를 열었다습니.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여배우가
미국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최지희가 뉴욕의 연극학교에 입학한 사실이 UPI 통신 기사로 실릴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파티가 끝나고 마지막 촬영을 하기 위해 만리동 촬영소에 도착해 새벽까지 촬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던 최지희는 총소리를 듣게 됩니다. 5ㆍ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최지희의 미국행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여권 발급이 안 돼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입니다. 그때 여권과장의 도움을 받아 최지희는 겨우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최지희의 미국 내 첫 거처는 연인인 박동선 씨가 있던 워싱턴 DC였습니다. 최지희는 여기서 랭귀지 코스를 마치고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네이버후드 플레이 하우스에 입학했습니다. 최지희는 여기서 연극, 모던 발레, 발음 연습 등 체계적인 연기수업을 받았습니다. 특히 돋보였던건 방학 전에 학생들이 공연한 <햄릿>에서 최지희는 오필리아 역을 맡아 열성적으로 연기했습니다.
이런 경력을 가지고 1962년 귀국을 한 이후 최지희는 20대에 들어선 ‘미국 유학파 배우’로서 좀 더 비중 있는 배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최지희는 영화 이외에도 전국을 도는 극장 쇼에 가수들과 함께 출연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엔 가수들보다는 배우가 간판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고, 현대적인 미모의 최지희는 어느 곳에서나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대신 최지희는 정권의 선거운동과 파티에 동원되는 ‘화초기생’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최지희는 이 시절을 ‘최고로 대우를 받던 시기’로 기억했다고 합니다.
최지희 귀국 후 대박나다
최지희의 미국유학 후 첫 작품은 <사춘기여 안녕>(1962)이었습니다. 트위스트를 추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발랄한 문제아에 대한 작품이었습니다. 미국에 다녀온 이후 자신감을 얻은 최지희는 연기도 한층 자신감이 붙어 있었습니다. 또 당시만 해도 여배우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배우라는 시장성까지 더해져 최지희는 그즈음 유행하던 국가 간 합작영화는 다 휩쓸면서 출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른 개의 작품에 동시 출연할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미국유학 후 최지희는 최지희 본인의 대표작을 찍게 되는데, 바로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김약국의 딸들>이었습니다. 원작자였던 박경리씨는 일부러 최지희의 약수동 집까지 찾아와 맡은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해 줄 정도로 작품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습니다.
최지희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유일하게 녹음한 영화가 바로 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최지희에게 대종상 여우조연상, 청룡상 여우조연상 등을 안겨주었습니다. 셋째딸 역은 사실상 주인공인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조연상으로 밀리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받은 상입니다.
최지희의 개성이 뚜렷하다 보니 불이익도 있었습니다. 당시 영화계는 남녀배우들이 커플을 맺어 콤비 플레이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요. 최지희만 그런 상대 남자배우가 없었던 탓에 적절한 배역인데도 빼앗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배우들이 “이 역은 최지희 것”이라며 밀어주곤 했다고 합니다.
최지희의 또 다른 대표작 <말띠 여대생>도 이때 작품입니다. 액션 코미디를 잘 만들었던 이형표 감독은 최지희와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최지희는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씨가 만든 의상을 트렁크 가득 준비해 가지고 가서 누가 뭘 입나 보고 슈팅 직전에 옷을 바꿔 입는 센스로 패션 아이콘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지희는 큰 키에 허리사이즈가 20인치이던 시절이라 어떤 옷을 입어도 눈에 띄는 서구적 아름다움을 보여줬습니다.
이 작품이 히트친 이후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연이어 발표됐습니다. <말띠 신부> (김기덕)도 최지희가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이런 작품을 할 당시 최지희는 재일교포 사업가를 소개받았습니다. 박동선씨와 결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던 시기였습니다. 재일교포 사업가와 결혼한 후 최지희는 영화 일을 잠시 접었고, 딸을 낳았습니다.
사업가인 남편은 최지희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여러 가지 사업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셋방살이까지 몰린 최지희는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결혼 3년 만의 일입니다.
최지희 사업가로 변신
이혼 후 영화계에 컴백한 최지희는 B급 저예산 영화였던 <남대문 출신 용팔이>(설태호 감독)에 출연하게 됩니다. 간판에는 ‘혜성같이 돌아온 최지희 컴백작품’이라는 타이틀이 붙었고, 영화는 기대 이상의 흥행을 보이며 지방극장가를 장악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최지희는 ‘의리의 사나이’ 용팔이(박노식)를 애먹이는 드세고 불량스런 애인 역을 맡았습니다.
영악한 최지희는 액션뿐만 아니라 <7년만의 외출>에서 매릴린 먼로가 보여줬던 스커트가 휘날리는 유혹적인 모습으로 발길질을 하는 섹시한 여성의 모습까지 가미시켰습니다.
이즈음 최지희는 MBC 전속 탤런트로도 활동을 시작해 TV드라마 <낮과 밤>에도 출연을 했습니다. <남대문 출신 용팔이>의 성공을 바탕으로 1970년대 극장가를 장악했던 용팔이 시리즈가 시작됐고, 최지희는 30편이 넘게 이어진 시리즈에 용팔이 애인 역으로 등장했습니다. 1971년에 최지희는 1971년 영화 '케이라스의 황금'에서는 의상감독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패션 디자이너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1973년 서른셋의 나이에 최지희는 폐가처럼 변해가는 한국영화계를 떠나 일본에서 사업가로 변신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최지희는 도쿄 아카사카에서 한국 음식점과 술집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성공합니다. 사람들은 최지희를 '아카사카의 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최지희는 1985년 4월 귀국해서 '코리아게이트'의 로비스트 박동선이 소유한 한남체인을 인수하고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한남체인은 전국 2000곳에 지점이 있는 국내 최초의 슈퍼마켓이었습니다.
최지희 별이 되다..
전통과 윤리를 따르며 희생하는 고전적인 여성상에 대항해 개인의 욕망에 충실한 적극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상을 보여준 최지희는 별이 됐습니다.
딸인 윤현주 씨에 따르면 “어머니가 루푸스병으로 고생하다 폐렴 증세로 17일 낮 12시쯤 은평 성모병원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했습니다. 최지희의 빈소는 서울 중구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에 마련됐습니다. 19일 발인이라고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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